14 Jibokjae(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 When we go out of Pilsungmun Gate in the west of Jangandang Hall in Geoncheonggung Palace, we can see Jibokjae and the Gyeongbokgung Palace's north gate, Sinmumun, on the wide area, in the northwest of Gyeongbokgung. Jibokjae was King Gojong's library and was constructed gorgeously in Chinese architectural style. The meaning 'Jibokjae' is 'a house where jade is collected'. It had collections of numerous precious books and was used as a library; thus, it could be interpreted as 'a house that collects precious books like jade'.
- gorgeously 화려하게
- architect 건축가/건축하다
- architecture 건축
- architectural 건축의
- collections 수집품/ 소장품/ 수집
- interprete 설명하다/ (특정한 뜻으로)이해(해석)하다/ 통역하다
- The wooden plaque of Jibokjae is hanging vertically. It is engraved with collected characters of Mi Yuanzhang, with his name and seal also inscribed on the left. He was a famous calligrapher in the Northern Song Dynasty. The hall was erected in Chinese style. The hall was unprecedentedly built in exotic Chinese style and has woldae and dapdo. Moreover, the sculptures' facial expressions on the woldae staircase and dapdo are grotesque and colorfully painted decorations are extremely florid. Dragon heads on the roof are very realistic, different from the dragon heads on the ridges of other buildings. Although Jibokjae appears to be a one-story building from the outside, it actually has a loft connected by a passage inside, making it a two-story structure.
- hang (타)걸다, 매달다; (자)걸리다, 매달리다/교수형에 처하다[교수형을 당하다]; 목을 매달다
- hang"**의 의미는 "매달리다" 또는 **"걸려 있다"
- hang hanged ~ 교수형에 처하다
- hang hung ~ 걸다
- plaque 편판
- erect 똑바로 세우다
- unprecedentedly 선례가 없이, 신기하게
- exotic 이국적인
- sculpt 조각하다/ 조각가
- sculpture 조각/ 조각품
- facial expression 얼굴표정
- staircase 계단
- grotesque 기이한
- florid (얼굴이)발그레한/ 화려한
- viewed 분사구문: being, having been 생략(분사구문이 수동일 경우 생략가능)
- passage 통로, 복도, 관, 흐름
- In back of the building, it has a full moon shaped window, and on both sides of the window, it has two half-moon shaped windows. To the east, the building is connected to Hyeopgildang Hall, which has the shape of Korean script 'ㄱ'. To the west, Jibokjae is connected to Parujeong Pavilion. King Gojong utilized these halls as gallery, library, and reception areas for foreign envoys. In 1893 alone he received diplomatic ministers from England, Japan, and Australia five times in here.
- script 대본, 글씨, 문자
- reception 접수처/ 환영(축하)연회/ 환영/ 맞이함
- reception hall 영빈관
- envoy 사절/ 특사
- Behind the Parujeong Pavilion, we can see the palace's north gate, Sinmumun. Traditionally, the gate was closed, and it was only opened when the king wanted to visit a back garden outside of Gyeongbokgung Palace. Currently, the area outside Sinmumun Gate is the road next to Cheong Wa Dae. The Cheong Wa Dae area used to be where the secondary palace of the Goryeo Dynasty was located. However,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King Taejo, the founder of the dynasty, used the area as a back garden of Gyeongbokgung palace.
- The area was called 'northern garden (Bugwon)' during King Gojong's reign, when the total re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was in progress.
- There were Yungmundang, Yungmudang, Chunandang Halls, Ongnyeonjeong and Gyeongnongjae Pavilions, as well as the king's rice paddies for chingyeongjye(a ceremonial plowing by the king to set an example as a farmer).
- In the higher area was Gyeongmudae where the king could inspect military trainings and hold banquets.
- Furthermore, King Yeongjo often used Sinmumun Gate on his way to Yuksanggung shrine, where his natural mother Lady Sukbin Choe's spirit tablet was enshrined.
- 융문당: 문과 과거시험장/ 현재 상춘재/
- 융무당: 무과 과거시험장/ 현재 녹지원
- 춘안당(春安堂): 융문당 부속건물(융문당 서쪽에 있음)
- 齋宿: 임금이 나라의 제사(祭祀)를 행할 때 그 전날(前-) 밤에 친히 재궁(齋宮)에 나와 묵으면서 재계(齋戒) 하던 일.
- 齋宮: 무덤이나 사당(祠堂) 옆에 제사(祭祀)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 齋戒: 종교적(宗敎的) 의식(儀式) 따위를 치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함.
- 옹련정: 옥련정은 총독관저가 들어선 이후에도 존재했으나 현재는 없다
- 경무대: 과거시험장과 군사시범훈련 참관장/ 현재 녹지원과 헬기장이 있다
- 수궁: 경무대 일대를 경비하는 군인들이 입직하던 곳/ 융문당 서쪽에 위치
- 경농재: 1893년(고종 30)에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지은 재당/ 영빈관 인근
- 경농재 영역(영빈관 인근): 1893년(고종 30)에 풍년을 기원하고자 조성한 논밭임-"팔도 배미"(조선의 전국 팔도를 따서 여덟 구역으로 나누고 임금이 몸소 농사를 지었음)
- 숙종의 가계도 - 숙종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희빈장씨-경종, 숙빈최씨-영조)
- 청와대: 고려 숙종(1104년)에 완성된 남경(서울)의 이궁자리/고려때 수도 개경 외에 작은 수도로 평양를 서경, 서울을 남경, 경주를 동경리라 불렀는데 이곳에 임금 행차시 머무를 수 있도록 이궁이라는 별궁을 세움
- 북송(960-1127)-남송(1127-1279)
- 조광윤이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에게서 선양을 받아 개봉에 도읍하여 세운나라로 국호는 송 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개봉에서 쫒겨나 남하한 뒤에는 남송과 구별하여 북송이라 불이었다
- 금(1115-1234)
- 퉁구스계 '여진족'이 건국
-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을 남으로 몰아냄
- 요(916-1125)
- 중국 북방 네이멍구 지역을 중심으로 거란족이 세운나라(거란국에서 요로 명칭 변경함)
- seal 인감. 도장/봉인 (하다)
- be used to ~ing ..에 익숙하다
- be used to 동사 .. 하기 위해 사용되다
- used to 동사 ..하곤했다, (현재는 그렇지 않다)
- paddy(field) 논
- (dry)field 밭
- tablet (약)정제/명판
- Government-General building 조선총독부
https://biz.heraldcorp.com/article/2862047
조선시대 궁궐 영건 연혁
최인화, 조선시대 5대 궁궐 건물지 기초의 고고학적 연구, 121~124p
궁궐은 창건 이후 크고 작은 화재로 소실과 재건이 반복되고, 상황에 따라 새로운 전각들이 추가되는 경우가 많다. 궁궐 건물지 분석과 정확한 편년을 위해서는 각 건물지의 중건 연혁을 확인하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5개 궁궐과 주요 전각의 중건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경복궁(景福宮)
경복궁은 태조 4년(1395) 창건되었다. 명종 8년(1553) 대화재로 16세기 중반 새롭게 건립된 전각들이 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 연간(19세기 중후 반)에 대대적으로 재건되었다.
주요 전각들의 중건 역사는 다음과 같다.
태종 11년(1411) 경복궁 안에 개천을 파고 명당수를 금천으로 끌어들였고, 태조 12년(1412) 경회루를 세우고 궐내를 수리하였다. 세종대에 오례(五禮)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궐내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명명(세종 8년(1426))하는 등 경복궁의 제반 시설을 신설·정비하여 조선의 법궁(法宮)으로서의 체제를 완비해나갔다.
세종 9년(1427) 영추문을 중수하고, 세종 10년(1428) 건춘문을 중건하였으며, 세종 13년(1431) 광화문을 고쳐지었다. 세종 20년(1438) 흠경각과 선원전을 준공하였으며, 세종 22년(1440) 교태전의 축조를 명하였다. 세조 7년(1461) 경복궁을 수즙(修葺)하도록 하였으며, 세조 8년(1462) 세자궁이 완성되었다.
명종 8년(1553)에는 대화재로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 등 내전 일곽이 모두 불에 타 이듬해 대대적인 중건 공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인해 궐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하고 270여년간 공궐(空闕)로 남게 된다. 그동안에도 영조 1년(1725) 숙빈의 사당인 칠궁(七宮)이 건립되었고, 정조 18년(1794) 흠경각과 수정전을 보수하도록 명하였으나, 순조 13년(1813) 수정전 행각은 화재로 소실된다. 이후 고종 2년(1865) 4월 대대적인 경복궁 재건 공사를 실시하여 정궁으로서의 위용을 되찾게 된다.
고종 10년(1873) 경복궁의 화재로 자경전 등 400여칸이 소실되는 한편 경복궁 북측에 건청궁이 건립되었다. 고종 13년(1876) 경복궁 자경전, 자미당, 인지당이 중건되었다. 또다시 화재로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 내전 전각 830여칸이 소실되었다. 고종 25년(1888)에는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이 재건되었다.
2. 창덕궁(昌德宮)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창건되어 15세기에 지속적으로 궐내를 정비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17세기 초~중반 광해군대와 인조대에 대대적인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후 18세기 정조대에 규장각 등 새로운 전각이 건립되었다.
주요 전각들의 중건 역사는 다음과 같다.
1399년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하였으나 태종 즉위 후 1404년 7월 다시 한양으로의 천도를 준비한다. 이직과 신극례를 한경이궁조성제조에 임명, 같은 해 10월 왕궁의 위치를 정하고, 1405년 2월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1405년 10월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며 10월 25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1411년 진선문과 석교를 건립하였고, 1412년 창덕 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준공하였으며, 1418년 인정전에 대한 개축 공사를 진행하였다. 세조 8년(1462) 주변 민가 (73가구)를 철거, 후원을 확장하였으며 연산군이 즉위한 1494년 후원을 더 가꾸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2년(1610) 재건되었으나,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으로 다시 한 번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14년(1636) 옥류천 인근 태극정, 소요정, 청의정이 건설되고, 인조 25년(1647) 인정전 동월랑, 승정원, 선정전 등 314칸의 외전과 대조전, 희정당, 태화당, 보경당, 정광루 등 내전 421칸 등 인조반정으로 소실된 건물이 다시 중건되었다. 효종대에 대비를 위해 수정당, 만수전이, 현종대에 집상전이, 숙종대에 제장각을 비롯한 청심정, 영타정, 사정기비각, 능허정, 애련정 등이 중건되었다.
숙종 30년(1704) 후원에 대보단이 건설되고, 영조25년(1724) 다시 중수되었다. 정조 원년(1776) 2층 누각인 주합루(위층)와 규장각(아래층)을 세웠다. 정조는 이외에도 규장각과 함께 개유와, 열고관, 봉모당, 서고, 서향각을 세워 그동안 수집된 임금의 자료와 도서류를 보관, 연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정전은 순조 3년(1803) 소실되었다가 그 이듬해 재건되었으며, 순조 33년(1833)에는 대조전, 희정당 등이 소실되어 1834년 재건되었다. 이후 순종 11년(1917) 대화재로 침전 건물이 소실되어 순종 14년(1920) 경복궁의 건물을 옮겨 재건하였다.
3. 창경궁(昌慶宮)
창경궁은 성종 15년(1484) 건립된 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17세기 초~중반 광해군대 및 인조대에 재건되었다. 이후 17세기 말 현종대, 18세기 말 정조대, 19세기 초 순조대에 일부 전각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주요 전각들의 중건 역사는 다음과 같다.
창경궁은 세조, 추존 덕종, 예종 세 왕후의 거처를 위해 수강궁 터에 지어졌다. 1483년 2월부터 지어 성종 15년(1484) 9월에 완공되었다. 이때 지은 전각은 명정전, 문정전, 수녕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등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군 3년(1616) 명정전, 인양전, 공사청, 문정전, 환경전, 홍화문 등이 중건되었으나, 창덕궁과 마찬가지로 인조 원년(1623) 인조반정으로 저승전 등이 소실되고, 그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이 소실되었다.
인조 11년(1633) 양화당, 통명전, 함인정, 환경전 등이 중건되었다. 현종 11년(1670) 건극당이, 정조 1년 (1777) 자경전이, 정조 3년(1779) 월근문이 건립되었다. 정조 14년(1790) 통명전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순조 30 년(1830) 환경전의 화재로 경춘정, 함인정, 숭문당, 영춘헌, 오행각, 빈양문 등이 소실되었다.
순조 34년(1834) 통명전, 여위당이 중건되었으나, 철종 8년(1857) 선인문, 위장소, 주자소, 동북소부장청, 대청판당 등 60여칸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고종 14년(1877)에 수리하였다. 순종 즉위 이후 창경궁은 극심하게 훼손 되었는데, 일제는 1909년 창경궁 내 동·식물원을 만들고 1909년 창경원으로 칭하며 궁궐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4. 경희궁(慶熙宮, 경덕궁(慶德宮))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 17세기 초 광해군대에 창건되었다. 19세기 초 순조대에 대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재건되었다.
주요 전각들의 중건 역사는 다음과 같다.
광해군은 즉위 후 창덕궁을 꺼려 새로운 궁을 짓고자 하였다. 먼저 인왕산 아래 인경궁(仁慶宮)을 지었으나,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술사 김일룡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웠는데, 그 궁 이 경덕궁(慶德宮), 지금의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광해군 12년(1620) 완공되었는데, 당시 정전, 침전, 동궁, 제별당, 나인 입주처 등 약 1,500칸의 건물이 지어졌다. 그 뒤 숙종 19년(1693) 일부 중수하였으며, 순조 29년(1829) 대화재로 회상전, 흥정당, 정시각, 집경당, 융복전, 사현각 등 전각의 절반가량이 소실되었다.
순조 30년(1830) 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소실된 건물을 재건(~1831년)하였다. 철종 11년 (1860) 일부 전각의 수리가 있었으나, 철종 이후 실질적인 왕궁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했다.
영조 36년(1760) 경덕궁의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꾸 었다. 추존왕 원종의 시호와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고 경성중학교로 사용되는 등 훼손과 변형이 이루어졌다.
5. 덕수궁(德壽宮,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은 17세기 광해군대에 ‘경운궁’으로 건립된 후 19세기 말~20세기 초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정궁이 되고 여러 전각들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손자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던 집으로, 임진왜란으로 피신했던 선조가 돌아온 뒤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1593년), ‘정릉동행궁’이라 하였다. 선조 28년(1595) 궁의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우고, 1597년 궁궐의 담을 쌓는 등 점차 궁역을 넓혔다.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을 세웠으며 광해군 3년 (1611)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다. 같은 해 병조판서 이항복이 궁장을 두르고 궁궐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침전 두 곳(즉조당,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며 경운궁은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태후와 태자비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다시 궁궐의 모습을 갖춰나간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 수리를 지시하였고, 같은 해 9월 대한제국 선포, 황제 즉위식 이후 정궁이 되었다.
1900년 1월 궁장 공사를 완료하고 전기를 끌어왔으며, 경복궁의 흥덕전을 경운궁으로 이전하는 등 선덕전(함녕전), 보문각을 이축 또는 신축하였다. 1901년에는 돈덕전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4년 대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 1905년 즉조당, 경효전, 함녕전, 석어당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에는 대안문을 수리한 뒤 그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꾼 뒤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고종이 이곳에 거주하며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0년에는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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